최근 벌거벗은 한국사 유튜브를 보면서, 초등학생 때 역사 시간에 처음 들었던 ‘몽골의 침략’은 마치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고려와 몽골의 여몽 전쟁을 공부하면서, 단순한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희생, 그리고 국가의 운명을 가른 치열한 생존의 드라마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침략과 저항, 그 속에서 고려는 어떻게 국호와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여몽 전쟁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생존의 지혜와 교훈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몽 전쟁의 배경과 시작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몽 전쟁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몽골은 이 사건을 빌미로 1231년, 3만 군사를 이끌고 고려 침략을 단행했습니다. 이 시기 고려는 100년 가까이 무신정권, 그중에서도 최씨 집안이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앙의 권위는 약했고, 기강도 해이해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2. 몽골군의 전략과 귀주성 전투
몽골 침략의 총사령관 살리타는 수도 개경을 빠르게 점령하는 전략을 펼쳤고, 부대를 나눠 주요 요충지를 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난공불락의 귀주성이 몽골의 앞길을 막았는데, 장군 박서의 지휘 아래 4개월 동안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귀주성 전투에서 김경손 장군은 단 13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을 기습, 몽골군을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몽골군조차 “이런 저항은 본 적이 없다”며 귀주성의 고려군을 극찬했습니다.
3. 강화 천도와 백성들의 고통
귀주성이 버티는 사이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고, 고려 정부는 항복을 준비했습니다. 1232년, 최씨 무신정권은 해전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정작 강화도에선 백성들을 동원해 궁궐부터 짓는 등, 백성들의 고통만 가중시켰습니다. 몽골군의 약탈, 무신정권의 무능, 계속된 침략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봉기까지 일으켰습니다.
4. 처인성 전투와 김윤후의 승리
몽골은 강화 천도에 분노해 곧바로 2차 침략을 감행합니다. 이때 용인 처인성 전투에서 승려 김윤후와 향·부곡·소 등 천민 출신 주민들이 힘을 합쳐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화살로 사살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처인성 전투는 작은 성에서 천민들이 중심이 되어 세계 최강의 몽골군을 물리친 상징적인 승리였습니다.
5. 팔만대장경과 몽골의 지속적인 압박
강화도로 물러난 고려는 무력 저항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몽골의 침략은 멈추지 않았고, 1253년 5차 침공에서는 국왕 친조와 개경 환도를 강요했습니다. 무신정권은 국왕의 권력 강화를 경계해 강화도에 머물렀습니다.
6. 충주성 전투와 노비 해방
1253년, 김윤후는 이번엔 충주성을 70일간 지키며 몽골군에 맞섰습니다. 식량과 무기가 다 떨어진 위기 속, 김윤후는 “계급에 상관없이 싸우는 자 모두에게 관직을 주겠다”며 노비 문서를 태웠고, 실제로 이 약속을 지켜 노비·천민도 관직을 얻었습니다. 이로써 충주성 전투는 민중의 사기와 참여로 버틴 상징이 되었습니다.
7. 30년 전쟁의 종결과 고려의 선택
30년 넘게 이어진 여몽 전쟁으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6차 침략 때 20만 명이 포로가 됐고, 백성들은 참혹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끊임없는 침략과 내부 부패에 지친 백성들과 군사들은 항전파 최의를 제거했고, 1259년 결국 강화론이 채택되어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개경 환도를 약속하며 전쟁이 마무리됩니다.
8.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은 이유와 원 간섭기
몽골 제국은 저항하는 나라를 철저히 파괴했지만, 고려는 9차 침략에도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해전에 약한 몽골이 끝내 강화도를 점령하지 못했고, 당시 남송 정벌에 집중해 완전 정복이 부담이었습니다. 최씨 정권의 벼랑 끝 전술, 그리고 1259년 고려 태자 원종의 쿠빌라이 칸 ‘역배팅’ 성공이 겹치며 고려는 국호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원 간섭기가 시작되지만, 고려 왕실은 오히려 몽골 황실과 혼인하며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 됩니다.
9. 여몽 전쟁이 남긴 교훈
여몽 전쟁에서 고려가 살아남은 비결은 왕실의 ‘역배팅’과 동북아 지정학의 흐름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존의 이면에는 백성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습니다. 고려 왕실의 정치적 생존과 백성들의 고통, 두 가지 사실을 모두 기억하며, 지금 우리의 사회도 위기 앞에서 무엇을 지키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