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육 환경에서는 학생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집단을 이끄는 리더십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미래 사회를 살아갈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역량 중 하나가 바로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앞장설 수 있는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이러한 리더십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인물이 바로 홍범도 장군입니다. 청산리 대첩은 단순한 전투의 승리를 넘어, 수많은 독립군과 민중이 한뜻으로 뭉쳐 불가능해 보이던 목표를 이뤄낸 생생한 리더십의 교과서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동료들을 격려하며, 명확한 비전과 용기 있는 결단력으로 대규모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삶과 청산리 대첩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 길러야 할 리더십의 본질과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청산리 대첩의 배경과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 작전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이 본격화되면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당시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 패배를 만회하고자 2~3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시베리아 13사단, 국내 19사단, 21사단 일부)을 간도 지역에 투입한다. 이른바 ‘훈춘 사건’을 조작해 파병 명분을 만들었고, 중국 정부는 전쟁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군의 한인 토벌을 묵인한다.
당시 간도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좌진·이범석의 북로군정서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해군 등 여러 독립군 부대가 활동 중이었다. 일본군의 대규모 진격에 맞서 독립군 연합부대(약 2천 명)는 산악지대인 백두산 인근으로 후퇴, 불리한 전력과 무기 열세에도 지형을 활용한 유격전을 준비한다.
2. 청산리 대첩의 전개 및 주요 전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주축이 된 독립군 연합부대는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 백운평 전투(10월 21일): 매복 작전으로 일본군 200~400명을 전멸시키며 전투의 서막을 연다.
- 완루구 전투(10월 21일): 홍범도 부대가 4시간 접전 끝에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 교묘하게 탈출한다.
- 어랑천 전투(10월 22일):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이 합류, 하루 종일 이어진 최대 규모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이 과정에서 독립군은 식량이 부족해 소나무 껍질로 허기를 달랬고, 현지 주민이 주먹밥을 전달해 돕는 등 민관 합동의 항쟁이 펼쳐졌다.
- 맹개골·천보산 등 소규모 전투(10월 23~25일): 연이어 벌어진 게릴라전에서도 모두 승리한다.
- 고동하 전투(10월 26일): 청산리 대첩의 마지막 전투로,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방어하며 최종 승리를 거둔다.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은 10전 10승의 압도적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 측은 피해를 축소했으나, 실제로는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뼈아픈 패배였다. 이후 일본군은 간도 참변으로 한인 마을에 무차별 보복을 감행한다.
3. 청산리 대첩의 의의와 홍범도 장군의 이후 삶
청산리 대첩은 무장 독립투쟁사의 가장 빛나는 승리로, 일본군 정규군을 상대로 대규모 연합작전과 전술적 승리를 일궈냈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승리로 독립군은 사기가 대폭 높아졌고, 이후 1만 명 이상이 밀산부에 집결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일본군의 보복으로 근거지를 잃은 독립군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 홍범도 장군은 무기와 보급을 구하기 위해 러시아로 이동, 항일 투쟁을 계속했으나, 러시아 혁명 후 정세 변화로 독립군은 분열과 좌절을 겪는다. 홍범도는 소련에 남아 농업협동조합을 만들고 고려인과 함께 생활하며, 공산당에도 가입하는 등 항일운동의 불씨를 이어갔다.
1937년 소련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약 17만 명의 고려인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당한 홍범도 장군은 그곳에서도 동포의 생활과 독립 의식을 지키려 애썼다. 그는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75세로 타국에서 눈을 감는다.
생전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된다면 꼭 나를 조국에 데려다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유해는 2021년 대한민국 대전현충원에 봉환되었다.
요약
청산리 대첩은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연합이 이룬 10전 10승의 역사적 쾌거였다. 홍범도 장군은 전투 후에도 끝까지 항일의지를 이어갔으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동포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진정한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