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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 조선의 국권 상실과 대한민국의 시작

브랜드 마케팅 인사이터 2025. 7. 3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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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

 

 

1. 국권 상실: 을사늑약과 한일 병합

 

조선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 병합으로 518년 왕조의 막을 내렸습니다. 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받았고, 1905년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을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독립국이 아닌 일본의 속국이 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후 순종이 즉위했으며, 1910년 이완용 등 친일파의 강압 속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 경술국치로 조선왕조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일본은 저항을 우려해 병합 사실을 일주일 뒤에야 비밀리에 공포했습니다.


2. 항일 투쟁: 안중근 의사와 동양평화론

일본 제국주의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해야 동양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은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사살했습니다. 체포 후 재판 과정은 부당했습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을 우려해 안중근의 재판권을 일본에 넘겼고, 일본은 뤼순 감옥에서 자의적으로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안중근은 자신을 "한국 의병 참모중장"이라 칭하며 독립 전쟁의 일환임을 주장했으나,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는 사형 집행 전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며 한국, 중국, 일본의 평화로운 공존을 주장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3. 독립의 외침: 3.1 운동과 유관순 열사

고종의 사망 소식과 독살설은 민족의 울분을 폭발시켰습니다. 1919년 3월 1일, 경성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 열사도 시위에 합류했고, 일본은 휴교령을 선포했습니다. 고향 천안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천여 명의 대규모 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이 과정에서 부모님을 잃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수감 후에도 1920년 3월 1일 옥중 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형무소 전체에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게 했습니다. 잔혹한 고문 끝에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17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4. 강제 동원: 일제 강점기 비극과 황국신민화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강제 동원을 강화했습니다. 1943년 많은 조선인이 군함도 탄광으로 강제 동원되어 50~70cm의 낮은 갱도에서 40도가 넘는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착취당했습니다. 가축 사료로 만든 주먹밥을 먹으며 살이 짓무르는 고통을 겪었고, 탈출 시도 시 가혹한 폭행을 당했습니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군함도에서만 조선인 122명이 사망했습니다. 일본은 **'국가 총동원법'**과 **'징용령'**으로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했으며,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백성으로 만들려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아침마다 일본어 암송과 궁성요배를 강요했고, 학교에서는 조선어 수업을 폐지했습니다. 모든 조선인에게 일본 신사 참배를 강요했으며, **'치안유지법'**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처벌하고 사상까지 통제했습니다.


5. 저항의 상징: 윤동주 시인과 박열 의사

암울한 시대, 윤동주 시인은 시로 저항했습니다. 194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1945년 2월 16일 "이질뇌"로 사망했다고 통보되었으나, 20대 청년의 사망 원인으로는 이례적이었고 유족 동의 없이 시신을 '규슈 제국 대학'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같은 형무소 사촌 송몽규의 증언과 '731 부대'의 생체실험 연루 의혹으로 생체실험 논란이 제기됩니다. 수감 중에도 그는 시를 통해 일제 치하의 고뇌와 저항 정신을 담았습니다.

박열 의사는 일본 내에서 폭탄 투쟁과 경고장 살포로 저항했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 후 일본 정부의 유언비어로 26,601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박열과 후미코에게 일왕 암살 시도 **'대역죄'**를 씌워 체포했습니다. 박열은 재판을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는 기회로 삼았고,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법정에서 일왕을 비판하며 "조선 민족은 결코 일본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박열은 해방 후 재일 동포 단체를 만들고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봉환하는 등 활동했습니다.


6. 광복: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일본은 항복을 결정했고,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로 방송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들은 어려운 일본어와 여전히 남아있는 일본군의 눈치 때문에 즉각적인 광복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독립운동가 함석헌 선생은 이날의 광복을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표현했습니다.

광복 당일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보복을 우려해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에게 협상을 제의했습니다. 여운형은 일본인의 안전을 대가로 정치 활동 불간섭, 정치범 석방, 식량 보장 등 5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총독부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여운형은 즉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8월 16일, 정치범 석방으로 독립운동가들이 풀려나 광화문에서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고, 이 만세 행진은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비로소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알렸습니다. 같은 날 오후 3시 10분,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발족 소식이 조선어로 공표되며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정부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서도 빛났던 독립을 향한 열망과 희생.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혹시 이 내용 외에 궁금한 역사적 사실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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